편지/쓰고싶다
택시에서
2018. 12. 17. 18:41정기외출 후 돌아가는 길에 어김없이 택시를 탔다. 1년도 넘게 반복한 길이지만 이 시간만은 여전히 짧게 느껴진다. 멈춰 선 택시 뒷좌석 한편으로 쇼핑백과 가방을 밀어넣고 힘들게 구겨 앉았다. 영하의 계절에 몸집은 평소보다 더욱 두툼했다. 왜인지 택시의 조수석이 앞으로 바짝 당겨져 있었다. 구겨진 몸을 조금이나마 펴서 편히 갈 수 있었다. 마포경찰서로 가자는 말에 아저씨는 밝은 목소리로 알겠다고 했다. 저녁 7시의 다른 기사들과는 사뭇 다른 목소리였다. 채 10분도 지나지 않아 목적지에 다다랐다. 평소보다 요금도 몇백 원 적게 나와 늘상 4,500원에서 5,000원 가량 찍히던 미터기엔 깔끔히 4,000원 찍힌 게 전부였다. 요금도 군더더기 없이 맞아 떨어졌고 이 택시도 마음에 들어 현금을 드려야겠다는 생..
성격이 되어버린 2
2018. 8. 27. 16:57가끔 도망치듯 느껴질 때가 있다. 생의 조건 같은 고통마저 돌아가려 할 때가 있다. 특히 감정에 있어선 유독 그랬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그려지는 갖갖의 형상들. 짜증으로 일그러지는 얼굴이나 뒤틀린 말투나 삐뚫어진 목소리들. 최선을 다해 그들을 피해 나갔다. 하루의 시작에 깨뜨린 물컵이 온종일 머릿 속을 이지럽히듯 그들과 마주한 날의 기분은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때로는 누구와도 마주 않는 시간을 살아보기도 했다. 그러나 살아가는 해답이 될 수 없었다. 군대에서는 특히나 더 그랬다. 어쩔도리가 없었다. 참다가 병을 키우는 쪽이었음에도 더 큰 인내심을 키워야만 하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새삼 느꼈다. 그동안 참으로 눈 가리고 아웅 편히 지냈음을. 보기싫은 것들은 어김없이 손바닥으로 가려버리곤 했다. 그럼으로써..
다시 사람
2018. 8. 1. 18:53사람을 싫어하고 있었다. 되풀이 되는 실망 속에서 그래도 희망은 시간 속의 사람들이라 여겨왔지만 어느새 싫어하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오늘 처음 만난 이에게조차 기대하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봤다. 기대가 없는 곳엔 시작도 없었다. 알아가고, 나를 보여주려는, 어떠한 노력도 없었다. 냉소적인 마음만이 자리 했다. 아무래도 조직에서의 오랜 생활에 지친 것 같았다. 그곳에서는 무엇과도 관계되기 싫었다. 눈을 뜨고 있어야 한다면 천장을 응시하거나 창밖 풍경에 시선을 돌렸다. 뭔가 해야겠다 싶으면 책에 묻혀 활자만을 따라갔다. 그런 하루 끝에 누구보다 먼저 눈을 감았다. 1년이 넘는 시간동안 이어진 생활이다. 올해 여름에는 잠시동안 다른 곳으로 파견을 나가게 됐다. 일터가 바뀌고 덩달아 함께하는 사람들에도 많은..
속삭이는 말
2018. 5. 31. 16:195월의 마지막날 18호차 객실에는 애틋한 모자(母子)가 있었다.늘 그렇듯 열차의 구석 모퉁이를 골라 앉은 나는 본의 아니게 그들의 작별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처음엔 단순히 함께 열차를 타는가 했다. 이미 부산역 광장에서 남자의 얼굴을 한번 봤던 터라 자꾸만 눈길이 갔다. 나의 앞쪽으로 자리한 두 사람 사이에는 평범하면서도 다가올 헤어짐을 암시하는 말들이 오갔다. '뭐 이렇게 뒤쪽 열차에 자리를 잡았대. 불편하지 않냐', '편하게 가려고 잡은거에요', '마중 안 해주셔도 괜찮아요'. 잠시뒤 어머니 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막 노트북 전원도 켜져 그들로 향한 시선을 거두던 참이었다. 출발 시각이 되고 열차의 문 닫히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조용한 객실 안으로 남자의 통화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헤어진 ..
속그림자
2018. 4. 29. 18:23그녀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엔 늘상 후회처럼 질질 끌려오는 생각들이 있다. 이건 정말 합리적이라고 아침을 나섰던 논리들은 하루의 끝에선 보기 좋게 꼬리를 내리곤 했다. 오늘은 한 마디 말이 문득 떠올랐다. 아니, 그보다도 앞서 나는 오늘도 사지 못한 옷 걱정을 하며 걷고 있었다. 가게와 빌딩의 창들에 번갈아 비치는 내 모습들은 너무도 멋없이 느껴졌다. 옷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래토록 아껴 입는 것만이 잘하는 것이 아니라고 몇 번이나 되뇌이며 다음번엔 꼭 옷을 사러 가리라 마음 먹었다. 바로 그때 그녀의 말이 떠올랐다. '입을 옷이 너무 없어. 쇼핑을 한 게 언제인지 모르겠어.' 오랜시간 시험 공부를 하는 그녀는 갈수록 여유가 없었다. 시간 뿐만이 아니라 각종 인강비·식비·교통비는 그녀의 씀씀이마저 머..
<끝내 바다에>
2018. 4. 23. 13:23지난밤 을 보던 사람들 때문이었을까. 영화 가 생각났고, 그 오프닝 곡이 떠올랐다. '출항(정재일)'. 의 'Hope(John Ottman)'이란 곡과 함께 가장 많이 나를 흔들었던 곡이다. 오늘은 그 곡을 다시 한번 듣고 싶었다. 개인용 폰 사용이 가능해지며 이렇듯 부대 생활 중 안락하게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된 환경에 감사하며 정재일의 또다른 음악은 없나 뒤적거렸다. 처음 보는 앨범들이 있었다. 2017년 10월, 입대 후 발매된 앨범들이 있었다. 란 앨범 커버가 마음에 들었다. 에서의 짜고 피비린내 나는 바다가 마음에 들었고, 그런 바다를 담고 있는 '출항'이 마음에 들었다. 그의 또다른 바다를 듣고 싶었다. 장사익이 아닌 처음 보는 소리꾼이었다. '한승석'과 함께 한 앨범이었다. 놀라웠다. 음악보..
춘몽
2018. 3. 15. 16:55흐느끼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옆자리의 후임 OO이가 울고 있었다. 처음엔 이른 시간의 잠꼬대인가 했다. 어제의 따뜻한 기운이 감도는 아침이었다. 단어처럼 반가운 봄비가 내렸다. 전날 열어 둔 창틈 사이로 봄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침상을 건너 가 손수건처럼 접은 휴지를 건넸다. 서럽게 울며 미안하다고 했다. 몇 달 전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도 서럽게 울며 미안하다고 했다. 꿈속에서 할아버지를 만나고 왔나 보다. 또다시 혼자 울고 있을까 멀찌감치 떨어져 붙어 있었다. OO이는 세면장에서 울며 세수를 하고 전화카드를 집어 들곤 나갔다. 나도 꿈속에서 할머니가 나오셨던 적이 있다. 라면을 끓여주시곤 흐뭇하게 먹는 모습을 끝까지 바라보셨다. 나는 잠에서 깨자마자 일이 없어 시간이 나서 전화를 했다며 할..
끝과 시작 6
2018. 3. 10. 00:12곡 선정이 그동안 많은 악영향을 끼쳤다는 생각을 했다. 내겐 '나 이 노래 좀 불러요' 하는 곡이 없었다. 최근 1년 들어서야 겨우 두 곡 정도 생겼을까. 이 노래 잘 맞는다는 얘기를 들은 곡들은 전부 내 기준에서 쉬운 곡들이었다. 정복하기 쉬운 곡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실기시험과 향상 연주회에서는 단 한 번도 부른 적이 없다. 지나쳤다. 몇 달 뒤 있을 실기시험 곡으론 몇 달간 집중하여 가까스로 정복할 수 있는 곡이 어울린다고 여겼다. 실력도 그렇게 늘어간다고 믿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정복에 성공했던 적은 없었다.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을 했고 과정에 후회 또한 없었지만 또다시 재현하고 싶은 결과는 단 한 차례도 없었다. 지금에 생각하길 잘할 수 있는 곡을 택하고 준비했더라면 음악적으로 더 많은 공..
동대문은 신설동의 남쪽
2017. 8. 22. 07:45여행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다른 이가 찍은 여행 사진도 마찬가지였다. 가까운 지인들이 내미는 사진들은 그들의 이야기 자체에 관심이 있어 유심히 들여다봤을 뿐 모르는 글쓴이·작가의 것은 관심 밖이었다. **경찰서 방순대로 자대배치를 받게 되며 서울의 주요 중심지들을 다니게 되었다. 광화문·경복궁 등 주요 시설 근무를 위한 것이었으나 모든 것인 처음인 신병의 입장에서는 때때로 여행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버스까지 타고 다니며 딱딱 내려주니 더욱 그랬다. 그러한 장소들 가운데서는 추억이 서려있는 곳들도 있었다. 나는 뜻하지 않게 사랑하는 이와 함께 걸었던 길과, 함께 식사했던 장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아마 그때부터였다. 오늘의 근무지로 향하는 버스를 타며 오늘은 어디로 가는 것인지 그것이 궁금해지기 시작..
편의점
2016. 7. 28. 23:53언젠가부터 편의점 알바생이 말을 걸기 시작했다. 나는 거의 매일, 적어도 이틀에 한 번은 도시락을 사러 편의점에 간다. 그날도 어김없이 도시락을 사기 위해 들린 날이었다. 늘상 그러했듯 너무나도 자연스레 계산대에 도시락을 올리고 계산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 꼼지락 거리다 좌측 가판대 아래쪽을 차버렸고 진열돼 있던 물건 서너개가 우수수 떨어졌다. 나는 당연히 허리를 숙여 물건들을 원상 복귀시켰다. 그런데 계산을 하며 얼핏 알바생의 웃는 모습을 본 것 같기도 하고 잠시 묘한 기운을 느꼈다. 그 때문에 당시에는 이렇게 주워놓는 사람이 나밖에 없었나란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그때부터였다. 도시락을 살 때마다 알바생이 한 마디씩 건네기 시작했다. "이 도시락은 좀 별로지 않아요?", "이게 그나..
바지사(史)
2016. 1. 16. 16:47두 번의 가을, 겨울 꼬박 2년 입었을까. 서둘러 버스를 타고 약속 장소로 향하고 있었다. 빈 좌석에 앉았는데 누가 물을 엎질렀는지 엉덩이가 축축해졌다. 조심스럽게 손을 넣어 만져보는데 섬뜩한 감촉이 느껴졌다. 바짓가랑이 쪽이 엄청나게 찢어져 있었다. 때는 겨울이었고 롱패딩을 걸쳤기에 그나마 망신은 면할 수 있었다. 사실 그순간 쪽팔림보다 앞서는 건 미래에 대한 걱정이었다. 가장 좋아하는 바지였다. 장담컨데 가을과 겨울을 지나며 이 바지외에는 입어본 적이 없다. 정기연주회에 검정 바지를 입으라고 하여 그걸 입은 것이 전부였다. 핏도 마음에 들고 소재도 따뜻하여 주구장창 입고 다녔다. 그것이 바지를 대하는 나의 태도였다. 그리하여 이제부터 당장은 뭘 입을지 이번 겨울까지만 버텨줬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들..
끝과 시작 - 반주편
2015. 12. 6. 22:05잠에서 깨면 악몽이 떠오른다. 오늘로 일주일 된 2학기 실기시험의 기억이다. 지난 향상음악회의 부족함을 만회해보려 더욱 신경을 썼다. 그러나 결과는 되려 그를 압도하는 악몽으로 남았다. 밝은 빛, 수차례 휘저은 손동작, 불안하고 통제할 수 없는 소리들. 시험이 끝나면 이번 학기를 끝으로 학교를 떠나시는 선생님께 깊은 감사의 인삿말을 건넬 생각이었다. 그러나 감히 그럴 수 없을 정도의 부끄러움만이 남았다. 이맘때면 시험이 끝났다는 소화감에 잠시나마 뿌듯함과 개운함을 느꼈겠으나 남은건 당혹스러움과 회의적 생각이 전부였다. 한 산문집의 떠오르는 구절이 있다. "떨어진 구슬의 끝을 보지 못하면 우린 영영 그 구슬을 주울 수 없다." 지난 한 학기는 떨어진 구슬의 끝을 찾기 위해 끝없이 헤매던 시간과도 같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