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에서 아날로그와 디지털에 관한 얘기가 나왔다. 요지는 간단했다. 아날로그란 '옛 것'과 같이 상대적인 개념이 아니라 빛, 파동과 같이 연속적인 속성을 지닌 것들. 자연현상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그리고 디지털은 이에 반하는 개념으로 비연속적인 속성을 지닌 것이다. 0, 1로 이루어진 컴퓨터를 떠올리면 된다. 그림으로 나타내면 아날로그는 sin 그래프에, 디지털은 막대 그래프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건 지금부터다. 교수님께서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차이점에 대해 말씀하신 후 아날로그를 디지털로 변환시키는 과정에 대해 설명하셨다. 거기에서 의문이 생겼다. '왜 아날로그 그 자체를 저장, 기록하지 않는거지? 그건 불가능한 것인가?' 나의 마음이라도 읽으신 건지 아날로그를 저장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이어서 얘기하신다. 아날로그란 연속적인 것이며 그 범위 또한 무한한다. 따라서 무한대의 값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무한대의 값을 가진 아날로그를 기록, 저장하기 위해서는 무한대의 저장 공간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아날로그를 기록, 저장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를 디지털로 변환하여 기록, 저장한다. 이를 위해 거치는 과정이 '샘플링' 과정이다. 샘플링 과정이란 아날로그 값을 동일한 크기의 구간들로 나눈뒤 같은 구간에 속한 값들은 모두 하나의 값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를 통해 데이터의 크기를 줄인다. 구간의 크기를 늘려 그 수를 줄일수록 용량은 더욱 작아진다. 반대로, 보다 잘게 나누어 구간의 수를 늘릴수록 용량은 커지며 본래의 아날로그 값과 비슷해진다.
설명을 듣고 나니 더욱 더 궁금증이 커졌다. '정말 아날로그 그 자체를 기록할 수는 없나?' 이전까지 음악에 있어서 WAV 파일의 경우 직접 듣는 것과 그리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다. 흔히 사람들이 얘기할 때에도 WAV 파일은 '무손실 파일'이라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디지털, 아날로그의 개념에 따르면 이는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다. 스마트폰으로 연주하는 피아노가 업라이트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과 그 정도나 질을 따지는 것이 불가능하듯 녹음된 음악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44000Hz 정도로 샘플링하면 인간의 가청주파수에서 손실이 없다고 느낀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본래와 비슷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성질 자체가 다르다. 아날로그는 정말 기록, 저장되어질 수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사람의 기억은 어떠할까. 이건 디지털인가? 아날로그를 디지털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샘플링' 과정을 거치듯 인간의 기억 역시 선택과 생략의 과정을 거치는데 그러면 이것 또한 디지털이라고 해야 하나? 기억을 담당하는 기관은 뇌이고, 이는 유기체의 일부인데 이것을 기계라 해야하나? 갑자기 인공지능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도 헷갈리기 시작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아날로그'에 사로잡혀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다 한 가지 의문이 더 늘었다. 위에서 말했듯이 아날로그의 특징은 연속적이며 그 범위가 무한하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똑같은 값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완만한 곡선의 경우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직선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기에서 직선으로 보인다는 것은 그것들(?)이 일직선상에서 같은 값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를 조금만 확대해봐도 그것이 결코 일직선상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결국 똑같은 것이란 없다'라는 결론을 생각해볼 수 있다. 어떤 한 순간을 포착한다는 것 자체도 불가능하며 혹 포착한다하더라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르다는 것이다. 과연 정말 그런걸까? 감정과 시간 같은 추상적인 것들을 제외하고 현상적인 것에 한해서라도 세상에 똑같은 것이란 정말 하나도 없을까? 속성, 형상 등 모든 면에서 100% 일치하는 것은 정말 그 어떠한 것도 존재할 수 없나? 정말?
+추가
뇌가 기억할 수 있는, 저장할 수 있는 용량이 무한대에 가깝다고 가정하면 뇌는 무한대의 저장 공간이라 말할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뇌는 아날로그 값(?)을 왜곡, 생략하지 않고 본래 그대로를 기억하고 저장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정말 아날로그 값을 순수하게 기억하고 저장할 수 있다면 이는 기억이 아니라 재현再現인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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