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라파엘 코러스의 합창을 들은 적이 있다. 라파엘 코러스는 시각장애인 합창단이다. 그들은 정지용의 시 <향수>에 멜로디를 붙인 노래를 불렀다. 매 가사의 끝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붙는다.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앞에서 노래하고 있는 이들의 마음이 느껴져서일까, 아니면 가사와 멜로디의 절묘한 조화 때문일까, 눈물이 났다.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라는 문장은 여전히 눈시울을 붉히게 한다. 노래를 부르던 그들에게 꿈에도 잊지 못할 풍경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생각해본다.
내게도 그러한 잊지 못할 장면이 있다. 2009년, 뮤지컬 동아리를 할 때였다. 우리는 9월, 개강일을 즈음하여 정기 공연을 했다. 공연을 할 때면 배우들은 무대의 양 옆 조그마한 공간에서 대기를 한다. 무대에 빛이 새어 들어가면 안 되기에 모든 조명을 소등하고 아주 작은 백열등 하나를 켜 놓을 뿐이다. 그곳은 어둡고 고요하며 긴장으로 가득하다. 나는 첫 막의 합창곡에서 솔로로 노래를 부르며 등장했기에 무대의 가장 앞쪽 옆에서 대기했다. 내 머리 위로는 그 작은 백열등 하나가 달려 있었다. 공연 시작 전에는 한 시간 가량을 그곳에서 대기하게 된다. 어두컴컴한 곳에서 조명들로 가득한 무대에 튀어나가야 하기 때문에 대기하는 동안 백열등을 쳐다보고 있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수많은 조명들에 눈이 멀어 순간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첫 공연이 있던 날이었다. 나는 그 백열등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다른 이들은 무대의 중간 옆쪽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내가 서있는 곳에서는 그들이 한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공연을 위해 지난 두 세달 간 쉬지 않고 연습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모두가 지쳐 있었다. 무대는 그 동안의 모든 노력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공연 시작 10분 전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긴장이 고조되었다. 그리고 잠시 뒤, 대기하고 있던 이들이 한 명의 포옹을 시작으로 다함께 끌어안게 되었다. 손모아 파이팅하며 전의를 불태우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고 다독였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곳에는 백열등에서 흘러나오는 조그마한 불빛만이 존재했다. 쓸쓸하다고 느낄 만큼 낡고 텅 빈 곳이었다. 그럼에도 모두가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순간 무한한 충만감을 느꼈다. 한데 엉켜있는 그들의 실루엣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잠시 뒤면 노래를 해야하건만 목이 메었다. 내게는 바로 이때가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리고 싶은 그림이 생겼다. 그 후로 그림 그리는 연습을 했다. 그때의 장면을 그림으로나마 꼭 남겨두고 싶었다. 사진으로도 남아 있지 않은 그때의 장면. 혹시나 잊어버릴까, 희미해질까 두려웠다. 그러나 그림 실력은 급성장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때의 장면을 묘사할 만한 실력이 되지 못한다. 그림으로 남기기는 포기하고 가끔씩이나마 그때의 장면을 회상하는 것이 전부다. 그럴 때면 참 따뜻하고 충만하다. 첨부한 사진은 '이브의 시간(2010)'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이다. 주인공이 처음 카페에 들어설 때 5초 가량 카페의 전경이 펼쳐진다. 이때 받은 느낌이 꼭 당시 무대 대기실에서 느꼈던 것과 비슷해 첨부해 봤다. 둘 다 그윽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것 같다. 2009년 당시 동아리 활동은 참 마음 속 깊이 박혀 잊혀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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